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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 그 화려한 역설』 할인가 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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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8,000원 등록일 21-04-09 23:25
글쓴이 최효언 조회 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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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정보>
제목 : 문명, 그 화려한 역설
지은이 : 최인
분류 : 장편소설
출판사명 : 도서출판 글여울
출판일자 : 2021년 3월 29일
페이지수 : 544p
도서 : 가로152mm 세로225mm 두께31mm 무게938g / 단행본 1권
할인가 : 18,000원 (정가 20,000원)
배송비 :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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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22
66 파트


  위대함이란 양쪽날을 가진 운검(雲劍)*과 같아서 한쪽으로는 죽이고 다른 한쪽으로는 생명을 구하는 법이다. ㅡ키에르케고르의 「공포와 전율」 중에서


 헌칠한 키에 오뚝한 콧날, 하얀 피부, 이국적 인상. 외모로 볼 때 그가 살인자라고 판단할 근거는 없었다. 그의 수려한 모습은 오히려 신성한 구도자처럼 보였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양복을 단정히 입고 우산을 쓴 모습이 그랬다. 그가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인 살인자고 문명의 파괴자라니. 나는 무심코 차창 밖으로 눈길을 던졌다. 거기에 누군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와 같은 행동은 인도에 사람이 쓰러져 있다는 걸 재확인하는 행위였다. 머리와 가슴에서 붉은 피를 흘리며 누워 있는 남자. 방금 전까지 내 곁에서 권총을 가지고 장난치던 청년. 그 청년을 확인하기 위해서 나는 인도 쪽을 보았다.
 그때였다. 내가 인도 쪽을 보았을 때 타임 애프터 타임이 흐르기 시작했다. 신디 로퍼가 부르는 타임 애프터 타임. 분명히 그것은 신디 로퍼의 타임 애프터 타임이었다. ‘침대에 누워 시계의 똑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당신을 생각합니다. 새로움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둥근 혼돈 속으로 빠져듭니다. 불빛이 은은한 밤도 이제 자취를 감추고, 시간이 흐를수록 추억의 가방만 남았습니다.’ 나는 잠시 신디 로퍼의 청량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때 이카로스가 들고 있는 쇠붙이가 내 쪽을 향해 움직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품속에 손을 넣어 38구경 권총을 움켜잡았다. 그 순간 나는 이카로스의 표백된 눈빛을 보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의 투명하리만치 맑은 눈빛. 그것은 살인자의 잔인한 눈빛이 아니었다. 그의 눈빛은 자유를 찾아 도망치는 선량한 들짐승의 눈이었다. 나를 향해 45구경 권총을 겨눈 이카로스는 망설였다. 거침없이 방아쇠를 당길 것인가. 그냥 돌아설 것인가 고민하는 눈치였다. 나는 그의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세하게 흔들리는 눈빛. 말 못할 공포에 질린 납빛처럼 창백한 표정. 모든 것으로 보아 그는 떨고 있는 게 분명했다. 단순히 쏟아지는 비를 맞아서 떠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떠는 건 또 한 명의 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다는 자괴감에서 우러나온 흔들림이었다.
 나는 천천히 38구경 권총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그 순간 그의 눈과 나의 눈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그건 본능적인 움직임이고 위험에 대한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서로에 대한 공포감과 두려움에서 유발된 직감적인 움직임. 상대방의 행동에 따라 대응하겠다는 절박한 몸짓. 그때 만약 부스럭 소리라도 들렸다면, 누군가 먼저 방아쇠를 당겼을 것이다. 그 촌철의 순간 그와 나는 서로를 뚫어지게 바라보기만 했다. 서로의 얼굴과 움직임을 날카롭게 응시한 채. 그런 태도를 보이는 그를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잠들어 있는 나에게 총격을 가하지 않은 이유를. 자신을 잡기 위해 잠복 중인 형사를 쏘지 않은 원인을. 그는 이미 류대를 향해 45구경 권총을 서너 발 발사한 뒤였다. 아니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돌아다닌 흉악한 살인범이었다. 나는 천천히 실탄이 박혀 있는 회전탄창을 돌려 총구에 맞추었다. 신디 로퍼는 계속 타임 애프터 타임을 소리쳤다. ‘언젠가 당신은 저만치 앞에 걸어가는 나를 부르겠지요. 당신이 나를 부르지만, 나는 당신이 뭐라고 이야기하는지 듣지 못합니다. 그때 당신은 천천히 가라고 말했죠.’
 나는 그때서야 이카로스가 총을 쏘지 않은 이유를 알았다. 그도 나처럼 신디 로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랬다. 그 짧은 순간, 단 몇 초도 되지 않는 순간 이카로스와 나는 공감했다. 음악을 듣는 순간만큼은 움직이지 말자고. 누구든 먼저 방아쇠를 당기지 말자고. 짧은 시간이지만 음악이 끝날 때까지 그렇게 참자고. 나는 그 숨 막히는 긴장감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류대가 쓰러진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류대의 머리와 가슴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붉은 피는 내리는 빗물에 섞여 도로를 가로질러 흘러갔다. 마치 어딘가로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진한 선을 그리며.
 모든 상황으로 보아 류대는 숨이 끊어진 게 분명했다. 이상한 것은 그때까지 권총을 잡은 채 놓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류대의 38구경 권총과 탄피 6개는 새빨간 피 위에서 조용히 누워 있었다. 오랜 동안의 긴장감과 기다림을 내려놓은 것처럼. 나는 다시 비를 맞는 이카로스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카로스는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 나를 쏘아보았다. 문득 그의 오른쪽 허벅지에서 흐르는 붉은 피가 보였다. 그도 류대가 쏜 총에 맞은 것이 틀림없었다. 45구경 권총의 탄피 3개가 보도 위에서 비를 맞고 있었다. 그렇다면 탄창에 남은 실탄은 서너 개 정도. 나는 6개의 탄환이 장전된 총구를 치켜든 채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그 순간 그도 불규칙한 호흡을 가다듬는 것 같았다. 그가 받쳐 든 우산이 미세하게 흔들린 것을 보아 그건 틀림없었다. 나는 호흡을 멈추고 하얗게 탈색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몇 초가 지난 다음 나는 조심스럽게 안전장치를 풀었다.
 신디 로퍼의 타임 애프터 타임이 끝나고 새로운 곡이 시작되는 중이었다. 나는 바로 그 순간을 기다렸다. 신디 로퍼의 타임 애프터 타임이 끝나고 다음 곡이 시작되는 순간을. 그것은 빗속에 서 있는 이카로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다만 그와 내가 다른 것은 그가 조금 더 주저한다는 거였다. 그 짧은 순간 이카로스의 눈은 내게 말하고 있었다. 제발 권총은 빼지 말자고. 그 현대문명의 이기를 더 이상 사용하지 말자고. 나는 다시 한번 호흡을 가다듬고 이카로스의 가슴을 겨누었다. 그때 막 마이클 런스 투락의 슬리핑 차일드 전주곡이 흘러나왔다.
 나는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 채 슬리핑 차일드의 전주곡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도 나처럼 슬리핑 차일드의 전주곡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짧은 순간이 지나간 뒤 나는 그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그때 그도 나를 향해 45구경의 방아쇠를 당겼다. 귀를 찢는 굉음과 함께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순간과 영원을 가로지를 듯한 날카로운 정적이. 그와 나는 빗물 위로 흐르는 정적을 삼키며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것도 순간이었다. 그가 절망적인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걸어왔다. 나는 그런 이카로스를 멀거니 쳐다보았다. 그가 비틀거리는 몸을 곧추세우며 또다시 방아쇠를 당기려 했다.
‘하늘의 은하수는 오직 너만을 위해 빛나지. 달은 너에게 저녁 인사를 하기 위해 왔구나.’ 투락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이카로스의 가슴을 향해 두 번째 실탄을 발사했다. 커다란 비명이 또다시 귓속을 후벼 팠다. 그것은 비명이 아니라 내가 든 총에서 새어 나간 폭발음이었다. 나는 귀가 멍멍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자욱한 화연 속으로 그를 보았다. 그때 거미줄처럼 금이 간 유리창 밖으로 그가 무너졌다. 붉은 피가 솟구치는 가슴을 한 손으로 움켜잡은 채. 나는 소리 없이 심호흡을 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세상은 참으로 거칠지만, 너는 너만의 세계를 만들어라. 바로 낙원이 있어. 내가 잠든 너를 보호해 줄 거야. 만일 세상 모든 사람들이 너와 같은 마음을 가졌다면 우리는 싸움도 하지 않고, 전쟁도 없을 텐데.’ 마이클 런스 투락의 슬리핑 차일드는 빗소리를 뚫고 계속 들려왔다. 도로에 쓰러진 채 피를 흘리는 이카로스와 류대를 향해 속삭이는 것처럼.

*운검(雲劍) : 임금의 행차 때 호위를 맡은 두 명의 무사가 차는 큰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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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73
16 파트


  이 세상에는 세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하나는 신을 발견해 적극적으로 섬기는 사람들과, 다른 하나는 신을 발견하지 못한 상태에서 구종(苟從)*하며 형식적으로 추구하는 사람들, 나머지 하나는 신을 발견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아예 추구하려 들지도 않는 사람들이다. ㅡ 파스칼의 「팡세」 중에서


“우리 클럽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철문 안으로 들어서자 백발노인이 손을 쑥 내민다. 나는 얼결에 노인의 깡마른 손을 잡는다. 노인이 반갑다는 듯 잡은 손을 아래위로 흔든다. 나는 잡은 손을 놓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선다. 노인의 손은 거칠 뿐만 아니라 죽은 사람처럼 싸늘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다가 노인의 모습은 이상하다 못해 기괴하기까지 하다. 즉 노인은 화려한 원단에 금은자수를 놓은 쥐스토코르를 입고, 어깨에는 자줏빛 비단 망토를 걸치고 있다. 문제는 화려해 보이는 옷이 금방 찢어질 것처럼 낡았다는 사실이다. 나는 놀란 눈으로 중세귀족 차림의 노인을 쳐다본다. 노인이 양치기 지팡이를 고쳐 쥐며 자신을 소개한다.
“나는 이 지하클럽 총책임잡니다. 바깥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지배인이라는 얘기지요.”
“아 영감님께서 지배인이십니까?”
“내가 지배인입니다. 여기서는 집주라고 부릅니다만.”
“집주?”
“웨이터가 알려 주지 않던가요?”
“얘기는 들었습니다.”
“아마 그럴 겁니다. 그래야 이곳까지 들어올 수 있으니까요. 선생도 알다시피 여기는 모든 게 바깥세상하고 다릅니다. 밖하고 안하고 차별화를 시도한다고 할까요. 본래부터 차별화 돼 있다고 할까요. 우리 지하클럽에선 지배인을 집주라 부르고, 웨이터를 하비, 여종업원을 미소리라고 호칭합니다. 그런 점 때문에 손님들이 혼란스러워 하지요. 어떤 손님은 이런 상황을 재미있어 해서 일률적으로 어떻다고 할 순 없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바깥세상하고 모든 게 다르다는 걸 염두에 두면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이곳에 적응하기도 좋고요.”
노인은 장황하게 설명하고 지팡이로 앞쪽을 가리킨다.
“어차피 우리 지하클럽을 방문했으니 내 방으로 가십시다.”
“영감님 방으로요?”
“선생은 내 손님이고, 나는 이곳 책임자니까 최소한의 예의는 갖춰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다음 방문한 목적도 달성하고, 시간이 남는다면 이곳 구경도 할 수 있는 거고요.” 
“아 네에…”
 집주라는 노인은 외모는 물론이고 말이나 행동조차 심상치 않다. 이국적인 이미지와 어눌해 보이는 말투. 사람을 압도하는 큰 키와 허리까지 내려오는 흰 수염. 얼굴에 촘촘히 박힌 주름살과 창백한 표정은 공포심마저 일게 한다. 게다가 정중히 갖춰 입은 쥐스토코르는 노인을 근엄하게 만들고 있다. 즉 옷 옆선과 뒤에 주름을 넣어서 장중한 느낌이 들게 연출했다. 또한 허리선 아래쪽에 철심을 빙 둘러서 한껏 부풀려 보이게 만들었다. 옷이 허리까지는 꼭 맞고, 폭이 넓어지면서 무릎까지 내려가는 스타일이다. 그뿐이 아니다. 초승달처럼 휘어진 행잉 소매에는 화려한 커프스까지 달려 있다. 옷이 낡은 것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완벽한 중세시대 복장이다. 내가 경계의 표정을 짓자 백발노인이 껄껄 웃는다.
“왜 내 모습이 이상합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속을 들여다보인 사람처럼 머리를 긁적거린다. 노인이 앞장을 서며 부드러운 말로 안심시킨다.
“걱정 말고 따라오십시오. 이런 옷을 입었다고 다 이상한 사람은 아니니까요. 보세요, 중세시대 귀족들이 입던 옷이라 꽤 젊잖아 보이지 않습니까? 요즘 옷보다는 좀 화려하고 장중해 보이지만 말이에요. 옷이 낡은 건 너무 오랫동안 한 가지만 입어서 그런 겁니다. 마땅히 입을 다른 옷이 없거나, 어울리는 옷이 없다고 할까요. 중세시대 이후 서구문명이 퇴락을 거듭하고 있어서 그렇다고 할까요. 인간의 순수성이 중세시대보다 더욱 나빠지고 잔혹해져서 그렇다고 할까요. 아무튼 이곳에선 아무도 선생을 해치거나 위험에 빠트리지 않습니다. 아니 해치는 게 아니라 정중하면서도 예의 바르게 접대할 겁니다. 당연히 처음 들어왔으니 겁도 나고 두려움도 느낄 테지요. 하지만 이곳은 그렇게 무서운 장소가 아니에요.”
 노인이 말을 마치고 붉은 카펫이 깔린 복도를 걸어간다. 나는 노인을 따라가며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한다.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은 어둑한 복도와 수많은 그리스 로마 신들 그림. 음산하고 으스스한 느낌이 드는 길고 복잡한 복도. 늘어진 거미줄과 어디선가 들려오는 물 떨어지는 소리. 낡은 쥐스토코르에 너풀거리는 망토를 걸친 노인도 이상하다. 마치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중세시대로 돌아간 느낌이다. 이곳은 술을 파는 나이트클럽인가, 아니면 인간세계와는 또 다른 지하세상이란 말인가. 나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집주라는 노인을 따라간다.

“이제 다 왔습니다.”
 한참을 걸어가던 집주가 커다란 철문 앞에 멈춰 선다. 나는 불안한 마음을 가다듬으며 웅장한 철문을 올려다본다. 집주가 양치기 지팡이를 들어 철문을 탕탕 후려친다. 몇 초 후 거대한 철문이 먼지를 날리며 드르륵 열린다. 집주가 열린 문 안으로 들어서며 점잖게 말을 꺼낸다.
“여기는 본래 제우스가 쓰던 방인데, 지금은 내가 사용하고 있습니다. 제우스를 비롯한 모든 신들이 도망쳐 버렸거든요. 아 도망치기보다 포기하고 갔다는 표현이 적당하겠군요. 건물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부실하고 낡은 상태니까요. 그래서 지금은 내가 맡아 임시 지휘본부로 사용하고 있는 중입니다. 나라도 남아서 이 지하클럽을 지켜야 하거든요.”
“여기가 임시 지휘본부라고요?”
“그렇습니다.”
 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집주를 쳐다본다. 내 반응을 살피던 집주가 지팡이를 들어 건너편을 가리킨다. 나는 뒤로 물러서서 출입문 맞은편을 응시한다. 집주가 벽에 걸린 그림을 보며 비긋이 웃는다.
“그 그림이 유명한 제우스의 맹약입니다.”
“제우스의 맹약?”
“쉽게 말해 제우스가 바람을 피우지 않겠다고 헤라한테 약속하는 장면이지요. 신들의 제왕으로서 품위를 지키고, 앞으론 절대로 한눈을 팔지 않겠다고 맹약하는 겁니다. 정부로 삼은 여자가 수십 명은 되거든요. 아니 강제로 범하거나, 동물로 변신해서 꼬인 여자가 더 많을 것 같군요.”
 나는 집주가 말한 그림을 힐끗 쳐다본다. 높은 벽을 꽉 채운 그림은 제우스와 헤라의 벌거벗은 모습이다. 헤라는 출렁이는 젖가슴을 드러내 놓고 제우스를 질책하고 있다. 반면 제우스는 중요 부분만 작은 천으로 가린 초췌한 모습이다. 집주가 헛기침을 큼큼 해 목청을 가다듬는다.
“그 그림이 말하는 것처럼 제우스는 호색한 신들의 제왕이었어요. 첫 번째 아내 메티스를 비롯해서 페르세포네, 에우리노메, 데메테르, 마이아, 테미스, 레토, 이오, 디오네, 칼리오페, 아프로디테까지 거느렸으니까요. 물론 신들의 여왕 헤라를 만나고 나서도 그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에우로페, 세멜레, 스틱스, 니오베, 안티오페, 알크메네, 올림피아스, 므네모시네까지 범하고 다녔어요. 더 가관인 건 제우스가 젊은 남자를 사랑했다는 사실입니다. 요즘 말하는 게이 같은 거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아무튼 제우스는 모든 여자를 집적거리다가 아르테미스 시종 칼리스토한테 푹 빠지게 됩니다. 칼리스토는 처녀로 남겠다고 애원했지만, 제우스의 집요한 유혹에 넘어간 거지요. 그 일로 제우스는 톡톡히 망신을 당하게 됩니다. 그 그림이 바로 그걸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신이든 인간이든 자기 본분을 잊고 날뛰다가는 이렇게 된다고 말입니다. 어때요? 그럴듯해 보이지 않습니까?”
“도대체 여기는 뭐하는 곳입니까?”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느닷없이 질문을 던진다. 집주가 멈칫 하더니 침착하게 대꾸한다. 
“이곳이 무얼 하는 곳이고, 어떤 장소인지 한마디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곳은 아무나 들어올 수 없고, 함부로 돌아다닐 수 없고, 마음대로 나갈 수 없는 장소라는 말밖에는. 아 또 한 가지, 이곳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곳이라는 것 외에 알려 줄 수가 없습니다.”
“……?”

*구종(苟從) : 분별없이 맹목적으로 쫓아 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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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23
20 파트
 

  욕망이라는 정념은 정기들에 기인된 정신의 분란으로서 그 정기들은 정신이 알맞다고 여기는 것들을 정신으로 하여금 장차 바라고 싶게 한다. 우리는 눈앞에 없는 선한 것의 현존만이 아니라 현재 존재하는 것의 보존도 아울러 바란다. 또한 나아가 이미 지닌 악과 장차 닥칠지도 모를 사예(邪穢)*의 결여까지도 바란다. ㅡ 데카르트의 「정념론」 중에서


 신세대를 자처하는 디나는 언제나 적극적이고 공격적이다. 평소 하는 말이나 행동은 물론이고 섹스까지도. 나는 그런 태도와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디나를 좋아한다. 무엇이든 주저하지 않고 실행에 옮기는 22살짜리 여자애. ‘오빠는 냄새까지 마음에 든단 말이야.’ 디나가 품에 안긴 채 조잘거린다. 나는 길고 탐스런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는다. 디나가 내 얼굴을 보며 생끗 웃는다. 나는 평소 디나를 사랑스럽고 귀여운 여동생처럼 대한다. 그럴 때면 더욱더 어리광을 부리며 매달린다. 디나가 이런 태도를 보일 때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남자친구와 헤어졌거나 절교를 당했을 때. 또는 말 못할 고민에 빠져서 속을 끓일 때 등이다.
“근무하다 맨홀 속에 빠졌다면서요?”
“그랬지.”
“그거 정말이었구나.”
“이젠 괜찮아.”
 나는 팔다리를 펴고 위아래로 움직인다. 디나가 내 몸 여기저기를 만지며 눈을 흘긴다.
“난 오빠가 많이 다친 줄 알았지.”
“보다시피 멀쩡해.”
“이렇게 멀쩡하다면 걱정 같은 건 하지도 않았을 텐데.”
“그건 그렇고 다른 사람은 없는 거지?”
 나는 불안한 얼굴로 침실 안쪽을 기웃거린다. 내 표정을 살피던 디나가 피식 웃는다. 나는 긴장감을 풀지 않고 집 안팎을 살핀다. 내가 이런 행동을 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건 디나의 아파트에 낯선 남자들이 들락거리기 때문이다. 나이가 지긋하고 사회적 지위를 가진 남자들이. 언젠가는 벌거벗은 40대와 욕실 앞에서 마주쳤다. 그럼에도 디나는 천연덕스럽게 그 남자를 소개시켰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쩔쩔맨다. 디나는 그런 나를 보고 바보처럼 순진한 오빠라고 놀려 댄다. 물론 디나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디나는 고급 룸살롱에 나가는 호스티스기 때문이다.
“뭐야. 급한 일이라는 건?”
“오빠가 보고 싶어서 장난친 거예요.”
“난 또…”
“그것 때문에 놀랐어요?”
“조금.”
“바보같이.”
 두터운 쌍꺼풀과 클레오파트라처럼 길쭉한 코가 개성인 여자애. 특히 하얀 피부와 늘씬한 키, 시원스런 눈매가 시선을 끈다. 나는 온몸이 매력 덩어리인 여자애와 봄날 오후를 만끽하는 중이다. 디나가 소파에서 일어나며 기지개를 켠다.
“음악 들을래요?”
“글쎄.”
“맥주라도 마시든지?”
“맥주라.”
“조금만 마셔요.”
“조금이라면 좋아.”
“어떤 걸로 할래요? 벡스 아니면 카프리?
“아무거나.”
 디나는 늘씬한 몸매를 보여주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옷도 속이 비치는 실크 소재만 골라 입는다. 지금도 디나는 투명할 정도로 얇은 원피스만 걸친 상태다. 브래지어는 물론이고 작은 팬티조차 입지 않고. 디나가 냉장고 안에서 캔맥주를 몇 개 꺼낸다. 나는 미끈하게 빠진 디나의 몸매를 지그시 바라본다. 디나가 캔맥주를 건네주며 속삭인다. ‘커튼 내릴까요?’ 나는 캔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게 좋겠다.’ 라나가 손을 뻗어 꽃무늬가 들어간 핑크색 커튼을 내린다. 환하던 거실은 이내 꽃무늬를 머금은 붉은빛으로 채워진다.
“오빠 스킨십은 느낌이 좋아요.”
 나는 디나의 희고 갸름한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새근거리는 디나의 얼굴은 귀엽다 못해 천진스럽다. 디나가 내 뺨에 키스하고는 쿡쿡 웃는다.
“오빠는 언제나 조용히 페팅을 해요?”
“아니 그냥 디나가 사랑스러워서.”
“섹시하지는 않고?”
“물론 섹시하기도 하지.”
“난 오빠 모든 게 좋아요. 페팅하는 것도 좋고 섹스를 할 때는 더 좋고.”
“나는 마음에 들지 않을까 봐 걱정했는데.”
“항상 괜찮았어요.”
“다행이다.”
“근데 한 가지 소원이 있어요.”
“나한테?”
“네.”
“무슨?”
“오빠 정액을 먹게 해 주세요.”“정액을 왜?”
“좋아하는 사람 정액을 먹으면, 진실로 사랑하게 된대요.”
“지금도 사랑은 하잖아.”
“오빠를 영원히 사랑하고 싶단 말이에요. 죽은 다음에도요.”
“죽은 다음에도?”
“말하자면 그렇다는 뜻이에요.”
“디나가 원한다면 그렇게 해.”
“약속한 거예요.”
“물론.”
“이제야 오빠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겠다. 영원히…”
 디나가 기쁨이 가득한 눈빛으로 빤히 쳐다본다. 나는 디나의 눈부시도록 투명한 알몸을 끌어안는다. 디나가 목에 양팔을 두르고 밀착해 온다. 나는 가슴에서부터 아래쪽으로 내려가며 페팅을 시작한다. 디나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양탄자에 주저앉는다. ‘오빠 손은 마술사 손 같아요.’ 디나가 억제된 신음소리를 뱉어 내며 몸을 비튼다. 나는 계속 디나의 매끄러운 몸을 더듬어 내려간다. 작은 우물처럼 패인 배꼽을 지나자 검은 숲이 보인다. 이슬을 머금은 숲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다소곳이 숨어 있다. 나는 그 작은 숲 깊은 곳에 손가락을 댄다.
“참을 수가 없어요.”
 디나가 가늘게 떨며 애절한 신음소리를 내뱉는다. 나는 이슬이 맺힌 검은 숲을 향해 좀 더 가까이 다가간다. 신비스런 숲은 촉촉하게 젖은 물기로 반짝인다. 나는 그 수풀 끝에 매달린 이슬에 혀를 댄다. 디나도 한껏 팽창된 페니스를 입에 넣고 조심스럽게 빤다. 잠시 후면 디나는 내 정액을 받아먹을 것이다. 영원히 사랑의 감정을 유지하기 위해서.

“오빠한테 물어볼 게 있어요.”
 조용히 누워 있던 디나가 상체를 일으킨다. 나는 온몸에 흐른 땀을 수건으로 닦는다.
“뭘 물어보고 싶은데?”
“어느 날 내가 죽어 버리면 어떡할래요?”
“디나가 죽다니 왜?”
“내가 갑자기 사라지면 어떡하겠냐는 말이에요.”
“당연히 슬퍼하겠지.”
“그뿐이에요?”
“그뿐이라니?”
“단순히 슬퍼하는 것뿐이냐 이 말이에요.”
“그야 잊지 못하겠지.”
“나하고 약속해요.”
“무슨 약속?”
“내가 죽어도 잊지 않는다는 약속.”
“그거야 어려운 건 아니지만…”
“그렇다면 약속해 줘요.”
“디나가 원한다면 그러지 뭐.”
“그럼 됐어요.”
 디나가 흡족한 대답이라는 듯 해맑게 웃는다. 나는 땀이 흥건한 디나의 목덜미를 쓰다듬는다. 디나가 벌겋게 상기된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나는 뒤엉킨 디나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진다.
“죽는 건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야.”
“나도 알아요.”
“그런데 왜 죽느니 뭐니 하는 거야?”
“그냥 해 본 거예요. 오빠가 어떻게 나오나 보려고.”
“세상은 할 일도 많고 끝도 없이 넓어.”
“살아 볼 만도 하고요.”
“그렇지.”
“그러니 죽으면 안 되는 거고요.”
“물론이지.”
“어때요. 내가 죽을 것 같아요?”
“어딘가 불안한 구석이 있어.”
“바보…”
 디나가 내 뺨을 살짝 꼬집었다가 놓는다. 나는 먹다 만 캔맥주를 마저 들이켠다. 디나가 다시 품에 안기며 중얼거린다.
“사실은 나 임신했어요.
“임신?” 
“누구 애인지 궁금하죠?”
“조금은.”
“걱정 말이요. 오빠 애는 아니니까.”
“……”
“산부인과엘 가야 되는데 같이 가 줄 남자가 없었어요.”
“……”
“오빠가 같이 가 줄 거죠?”
“알았어.”
 나는 시원스럽게 대답하고 눈을 감는다. 섹스의 뒤끝을 음미하듯 디나가 품속으로 파고든다. 나는 눈을 감은 채 디나의 알몸을 꼭 끌어안는다. 디나의 마음을 점령한 고민을 해결해 줘야 한다. 그래야 디나와 한 약속을 지켜 주는 것이 된다. 디나에 대한 나의 신뢰를 확인시키는 것이기도 하고.


*사예(邪穢) : 사악(邪惡)하고 더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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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 최인
상세분류 : 소설
총 페이지 : 544p
정가 : 2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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